사카모토 류이치(坂本龍一)
어렸을 적에 유치원의 방침으로 세 살때 피아노를 배운 이후 혼자 작곡을 시작하였고 열 살 때에는 도쿄 예술 대학 교수 마츠모토 타미노스케(松本民之助)에게 작곡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14살때는 자신이 드뷔시의 환생이라고 생각하였다고 합니다.
등학교 때는 재즈와 록을 중심으로 음악을 즐기며 연주를 했지만 포크 장르는 좋아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때부터 학생운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며 대학 재학 때에는 민족음악학 강의를 하였던 고이즈미 후미오(小泉文夫)의 수업을 듣고 여태껏 가지고 있던 음악관의 기초가 흔들리는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대학원 재학 중에 토모베 마사토(友部正人)의 ‘誰もぼくの絵を描けないだろう’에 피아노로 참가하여 뮤지션으로써 경력을 시작하고 여러 밴드들의 키보드와 편곡자로 참가하며 활동을 하다가 78년에 YMO(イエロー・マジック・オーケストラ)를 결성하여 두 번째로 발매한 앨범 ‘ソリッド・ステイト・サヴァイヴァー’가 음반사의 전략적인 홍보로 인하여 외국에서 먼저 인기를 얻고 나서 일본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고 자신의 첫 솔로 앨범 ‘千のナイフ’를 발매하기도 합니다. YMO는 2 번에 걸친 월드 투어를 실시하였습니다.
81년부터는 NHK-FM에서 ‘サウンドストリート’의 진행을 맡으면서 화요일에는 아마추어 뮤지션으로부터 보내진 테이프를 방송에서 방송하는 '데모 테이프 특집'이 비정기적으로 이루어졌고 이 코너에서 데뷔한 음악가들도 상당수 있을 정도로 그의 비평은 아마추어 음악가들에게 인기였습니다. 또한 펑크 밴드 ‘TACO’에도 참가하엿고 이후에도 언더 그라우드 음악가들과도 교류가 계속 이어지게 됩니다.
82년에는 ‘RCサクセション’의 이마와노 키요시로(忌野清志郎)와 함께 ‘い・け・な・いルージュマジック’을 발매하여 사회적인 충격을 불러오기도 했습니다.
83년에는 ‘戦場のメリークリスマス’에 출연을 조건으로 음악을 담당하였고 이 작품을 통하여 87년의 ‘ラストエンペラー’에서의 출연과 음악에 참여하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이 작품을 통하여 일본인으로써는 처음으로 골든 글로브상을 수상하며 아카데미상 작곡상까지 수상하게 됩니다.
90년부터는 자신의 활동 거점을 미국 뉴욕으로 옮기게 됩니다.
92년의 바르셀로나 올림픽의 개회식의 매스 게임의 음악을 작곡하였습니다.
이후에도 다채로운 활동만큼 사생활도 여러 면에서 문제가 되기도 하였지만 평탄하게 넘어간 편으로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습니다.
11년에는 트위터로 한국공연의 요청이 있은 뒤에 10년 만에 내한공연을 가지면서 다른 지역에서는 자신의 음악의 팬들이 40~50대의 남성이 많은데 여성 팬들이 많은 것에 감명 받았다고 하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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